EU, CSRD와 CSDDD 등 ESG규제 완화·연기 발표

EU는 지난해 12월 9일, ESG 규제인 CSRD와 CSDDD를 ‘전면 후퇴’ 수준으로 완화·연기할 것을 발표했습니다.

적용대상 역시 초대형 기업 위주로 좁히면서 한국 기업에게도 규제 부담과 전략이 크게 재조정되는 국면이 열렸습니다.

다만 역외 기업에 대한 적용과 공급망 책임 원칙은 유지되고 있으므로 중장기적으로는 완화된 규제에 맞는 현실적 ESG 전략이 필요합니다.

적용 기업 범위 및 위반 제재 대폭 축소

지속가능성 보고 지침(CSRD)의 적용 기준은 직원 수·매출 기준 모두 상향되면서, 당초 수만 개에 달하던 대상 기업 중 약 90% 이상이 빠져나간 것으로 평가됩니다.

공급망 실사 지침(CSDDD, 일명 EU 공급망법)은 5천 명 이상 직원, 연 매출 15억 유로 이상의 초대형 기업만 적용하도록 조정되었고 역외 기업도 EU 내 매출이 이 기준을 넘는 경우에만 대상이 됩니다.​

기업이 기후전환·탈탄소 계획을 반드시 수립해 보고하도록 했던 조항 등 “녹색 전환 계획” 의무가 삭제되거나 임의화되었습니다.

CSDDD 위반 시 부과될 수 있는 과징금 상한도 글로벌 매출의 5%에서 3% 수준으로 낮아지는 방향으로 정리되었고, 민사책임 범위도 축소되었습니다.

또한 2025년 도입된 이른바 ‘Stop-the-clock Directive’에 따라, 원래 2025·2026 사업연도부터 보고 의무가 발생할 예정이던 일부 CSRD 대상 기업의 보고 시점 역시 2년가량 뒤로 미뤄졌습니다.

CSDDD 역시 회원국 국내법 전환 기한과 기업의 실사 의무 이행 시점이 순차적으로 1년 이상씩 유예되면서 실질적인 법 집행은 2029년 전후로 보는 시각이 우세합니다.​

EU ESG규제, 왜 이렇게까지 후퇴했나

EU 내부에서 “ESG 규제가 지나치게 엄격해 유럽 기업이 미국·중국에 비해 경쟁에서 밀린다”는 우려가 수년간 누적되었습니다.

이를 배경으로 중도우파·보수 세력이 극우 정파와 손잡고 규제완화안을 밀어붙였습니다.

특히 에너지 집약 산업·전통 제조업을 대표하는 이해관계자들이 고용·투자 위축을 강하게 경고하면서 유럽의회 내에서 ‘기후 리더십보다 산업 경쟁력 우선’ 기조가 힘을 얻은 것입니다.

미국과 카타르 등 천연가스 공급국 정부와 대형 에너지 기업들의 압박도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엄격한 공급망·기후 실사 의무가 유럽과의 LNG 거래를 위축시킬 것이라는 논리를 앞세워 EU에 제도 완화를 지속적으로 요구해 왔습니다.

에너지 안보와 가격 안정이 유럽 정치의 핵심 이슈로 부상한 가운데, ESG규제를 둘러싼 에너지 외교가 실제 입법 과정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이외에도 중견·중소기업을 중심으로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보고서·실사 의무를 감당할 인력과 시스템이 없다”는 불만이 폭발하자, 집행위원회도 행정 부담을 줄이기 위한 ‘옴니버스 완화 패키지’를 추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결과 법의 구조와 원칙은 유지하되, 실제 부담은 가장 큰 플레이어에게만 지우는 “규모 중심의 타깃 규제”로 방향이 바뀌었다는 평가가 다수입니다.

역외 기업 관할권 및 공급망 책임 등 유지

EU 외 기업이라 하더라도 EU 내 매출이 일정 규모를 넘으면 CSRD·CSDDD 적용을 받는 역외 조항은 유지되었습니다.

한국 대기업 그룹처럼 유럽 매출 비중이 의미 있는 기업들은 역외 기업이라는 이유만으로 규제를 회피할 수 없는 구조는 계속되는 셈입니다.

완화 이후에도 기업이 인권·환경 침해를 ‘알면서 묵인’하거나, 합리적인 예방·시정 조치 없이 방치할 경우 제재 대상이 된다는 기본 구조는 유지됩니다.

실사 강도의 세부 기준과 범위는 줄었지만 자사 공급망을 모른 척 하는 경영은 더 이상 허용되지 않는다는 방향성은 그대로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EU의 규제 완화보다 중요한 지점은 글로벌 자산운용사와 대형 금융기관들은 이미 자체적으로 기후·인권 리스크 관리 기준을 고도화하고 있으며, 많은 경우 법이 요구하는 수준보다 더 높은 ESG 데이터를 요구한다는 점입니다.

ESG 공시·실사를 법적 ‘최소 기준’으로 보는 자본시장의 시각이 유지되는 이상 규제 완화가 곧바로 ESG 요구 수준의 하향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중견·중소기업 역시 계약상 의무까지 벗지 못해

중견 수준의 한국 수출기업 상당수는 상향된 임직원·매출 기준으로 인해 당장 대비해야 했던 직접 CSRD 보고·CSDDD 실사 의무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큽니다.

반면 유럽에서 수십억 유로 이상 매출을 올리거나 다수의 계열사를 보유한 대기업 그룹은 여전히 직접 대상이 될 수 있고, 특히 에너지·소재·패션·식품 등 고위험 섹터는 사실상 ‘우선 관리 대상’으로 남습니다.

CSRD·CSDDD의 직접 대상이 되는 EU·역외 대기업은 전사적 측면에서 실사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한국 협력업체·하청업체에 ESG 정보를 요구하고 계약상 의무를 부과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따라서 국내 중소·중견기업도 “법 적용 대상이 아니니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고 보기는 어렵고, 오히려 대기업 고객사의 ESG 요구가 더 정교해질 수 있음을 유의해야 합니다.​

이번 완화는 규제 준수의 속도와 범위를 조정한 것일 뿐, 탄소중립 및 인권 존중이라는 패러다임 자체를 되돌린 것은 아닙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어떻게 빠져나갈 것인가”가 아니라 “완화된 규제가 요구하는 현실적 기준선이 어디인가”를 정확히 그어보는 일이 될 것입니다.​​

공급계약·하청계약에 ESG 조항을 삽입하는 작업은 이미 유럽에서 빠르게 진행 중이며 한국 기업도 표준거래조건에 인권·환경·부패방지 조항을 체계적으로 편입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부적으로는 윤리규정·행동강령· 공급망 관리 규정을 CSDDD의 기본 구조(위험 식별 > 예방·시정 > 구제·소통)에 맞춰 정비해 두면 향후 법적 의무가 확대되더라도 추가 비용 없이 대응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유럽의 논의는 결국 “이사회가 기후·인권 리스크를 얼마나 진지하게 다뤄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귀결됩니다.

​한국 상장사는 이사회 규정과 내부 ESG위원회 규정, 경영진 성과평가 체계에 기후·인권 관련 KPI를 어느 수준까지 반영할 것인지 선제적으로 설계해 두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실제로 투자자·고객이 궁금해하는 것은 귀사가 ESG리스크를 어떻게 관리하고 있는지에 대한 서사입니다.

ESG보고서 및 지속가능경영보고서를 규제 대응 문서가 아닌, 사업 전략 및 리스크 관리, 지배구조 개선 등 하나의 이야기로 엮어내는 전략 커뮤니케이션 도구로 재정비해두심이 적절합니다.

국내 기업은 당장의 압박이 완화된 현 시기를 ESG거버넌스와 공급망 관리 체계를 돌아볼 시간으로 활용해두실 것을 권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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