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5-26
화석연료 투자액 및 감축목표 데이터 미공개 지속
탄소가격 신호기능 마비…민간 투자자도 갈피 못잡아
‘배출권 30% 유상 전환, 한국형 시장안정화예비분(K-MSR) 도입, 벤치마크 75% 확대’
정부가 내놓은 4차 개편안의 ‘수술 도구’들이다. 하지만 아무리 정교한 제도를 만들어도 420조원 정책금융과 1300조원 공적자금이 같은 데이터를 보고 움직이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라는 지적이 제기된다.
한국은행 스트레스테스트는 기후변화 무대응시 은행 손실이 최대 28조7000억원에 달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런 막대한 손실을 막으려면 금융권의 체계적 대응이 필수적이다. 하지만 그 대응의 출발점이 되어야 할 데이터 투명성에서 한 가지 공통점에 도달한다. 바로 ‘숫자의 부재’다. 1000조원을 굴리는 국민연금이 정작 자신의 나침반을 꺼둔 채 항해하고 있는 것과 같다는 지적이다.
국민연금은 2018년 탈석탄을 선언했지만 여전히 화석연료 투자 잔액도, 금융배출량도, 감축 목표도 베일에 싸여 있다. 실제로 국민연금은 탈석탄 기준을 정하는 연구용역을 진행했지만 그 결과조차 공개하지 않고 있다.
국내 ESG평가기관의 한 연구책임자는 “국민연금이 조용하면 다른 연기금과 보험사들도 투자를 미루게 되고, 결국 자본시장의 탄소 가격 신호는 꺼진다”고 지적했다. 국내 최대 기관투자자의 침묵이 시장 전체의 마비로 이어지는 구조다.
해외 상황은 크게 다르다. 노르웨이 국부펀드는 포트폴리오의 모든 배출량을 실시간으로 공개하며 2030년까지 집약도를 55% 줄이겠다고 밝혔다. 네덜란드 연기금 ABP는 석탄과 타르샌드 매출이 5%를 넘는 기업을 2025년까지 모두 매각하겠다는 로드맵을 제시했다. 일본 GPIF조차 ESG 투자 관련 보고서를 매년 공개하며 2027년까지 ‘스코프3 커버리지’(기업의 전체 온실가스 배출량 중 공급망 등 간접 배출원을 포괄하는 범위)를 100%로 확대하겠다고 발표했다.
국내에서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한국투자공사(KIC)는 녹색채권 보유액 41억달러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있다. 투명성 격차는 냉정한 현실로 드러난다. 화석연료 투자 잔액 공개 여부를 보면, 국민연금은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는 반면 해외 주요 연기금들은 모두 상세한 내역을 공개하고 있다.
최환석 국회 정무위원회 전문위원은 “차기정부가 들어서면 국민연금 등 공적기금의 화석연료 투자 및 금융배출량 공시 의무화는 구체적인 적용범위나 시점 등을 금융당국과 논의해야할 것”이라며 “소관상임위인 보복위, 기재위 등과도 협의가 필요한 사안”이라고 밝혔다. 박희정 법무법인 대륜 입법전략본부장은 “정무위와 기후위기특위, 환노위에서 올해 하반기와 내년 상반기에 어떤 의지를 갖고 있느냐에 따라서 많은 변화가 올 수 있다”고 말했다.
숫자를 감추면 시장은 그 불확실성에 대해 비싼 값을 매긴다. ESG펀드들은 국민연금이 투자한 대기업들의 배출량 데이터를 구할 수 없어 리스크 프리미엄을 높게 책정할 수밖에 없다. 그 여파는 고스란히 금융권 자본비율 악화로 되돌아온다.
한은이 경고한 대규모 금융 손실도 결국 데이터 투명성 부족에서 비롯된다. 국제 신용평가사들도 “2027년 이후 탄소규제가 강화되면 데이터를 공개하지 않는 자산에는 할인을 적용하겠다”고 경고하고 있다.
전환의 속도를 높이려면 국민연금이 먼저 문을 열어야 한다. 노르웨이와 네덜란드 사례가 보여주듯, 일단 공개가 시작되면 기업들과 자산운용사들이 앞다퉈 배출량 개선에 나선다.
정부도 정책적 지원에 나서고 있다. 환경부와 거래소는 4차 계획기간에 총량을 대폭 줄이고 유상할당을 늘리며 시장안정화 예비분으로 가격 급락을 막겠다는 밑그림을 그렸다. 하지만 420조원이라는 거대한 정책금융도 데이터라는 창문이 열려야만 비로소 제대로 된 녹색 자본이 될 수 있다.
배출권 가격이 현실화되고 시장안정화 장치가 작동하더라도 결국 돈을 움직이는 건 데이터다. 국민연금이 화석연료 투자와 금융배출량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공공과 민간이 같은 정보를 보고 위험과 기회를 판단할 수 있어야 한국 자본시장이 ‘탈 기후금융 후진국’의 해법을 찾을 수 있다.
김수환 기자(ksh@viva10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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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脫 기후금융 후진국②] 국민연금, 그린머니 ‘깜깜이 투자’…배출권시장 정상화 최대 ‘걸림돌’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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